강정애씨(사진=SPN)
강정애씨(사진=SPN)

리더십도 타고나는 것일까? 강정애씨(61)는 자유를 찾아 남녘 땅을 밟은 지 3년만에 남다른 카리스마로 아파트 대표를 맡았다. 북에 있을 때도 인민반장, 여맹위원장을 도맡았다고 한다. 심지어 태국 수용소와 하나원에서도 반장을 맡았다. 지금은 실향민 단체인 북청군 장연회 부회장과 부녀회 감사로 활동하고 있다. 

강씨는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위해, 헌신할 수 있다는 것이 늘 감사하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중국에 남아있던 가족들을 남으로 데려올 때의 기쁨과 감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강씨는 어렵고 힘든 순간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참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말했다. 한국에 정착하기까지 늘 도움의 손길을 느꼈다고 한다. 이제는 그 감사함을 보답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고, 그 때가 가장 뿌듯하고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새중앙교회에서 간증 중인 강정애씨(사진=강정애씨)
새중앙교회에서 간증 중인 강정애씨(사진=강정애씨)

▶ 18년 만에...라디오를 통해 오른 탈북길

고난의 행군 때 같은 해에 남편, 시어머니, 시동생들의 장례식을 연달아 치르면서 손가락 싸맬 천도 없을 정도로 가난했다. 친척한테 돈 좀 빌리러 몰래 중국에 갔다가 인신매매를 당했다. 중국에서 아이 낳고 정착해 갈 때 즈음, 2001년에 북송됐다. 북한 고아원에 맡겨진 딸을 찾아 다시 중국으로 나왔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느 날 아들이 라디오를 들고 와서 엄마 고향 말 같다며 들려줬다. KBS ‘보고 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였다. 난생 처음 듣는 한국 방송이었다. 방송에서 우리 같은 사람을 ‘탈북자’라고 불렀다.

그 방송을 듣기 위해 김치 장사도 그만뒀다. 밤 10시부터 방송이 나왔고 낮에는 재방송이 있었다. 방송에서 탈북 이야기를 들으면서 탈북할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도 가야겠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갈 수 있는 방법을 몰랐다. 중국에서 숨어서 살아야 되니까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어서 혼자 고민만 하다가 KBS 방송국 주소가 나오는 걸 듣게 됐다.

내 이야기를 써서 팩스로 KBS에 보냈다. 그러고 얼마나 지나서 방송에서 ‘중국 흑룡강성에서 모녀가 탈북을 시도하고 있다. 기부금을 모아야 되니까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내용이 나왔다. ‘나구나!’ 싶어서 기다렸다. 몇일 후 어떤 목사님으로부터 시내로 나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당시 길림으로 시집간 딸도 급히 불러 같이 길을 떠났다.

목사님이 연락해 둔 브로커를 통해 한국으로 오게 됐다. 이렇게 18년의 중국 생활을 끝냈다. 한국에 와서 라디오에서 목소리로만 듣던 이소연 아나운서를 만났고, KBS에서 탈북 비용을 다 내줬다고 들었다. 너무 감사할 따름이다.”

 

서울동부하나센터와 함께 하는 추석 맞이 나눔 행사(사진=강정애씨)
서울동부하나센터와 함께 하는 추석 맞이 나눔 행사(사진=강정애씨)

▶ 아파트를 살린 '201호'

한국에 와서 처음에는 중국에 있는 가족들을 데려오기 위해 초등학교 영양사로 일했다. 하지만 북송 당했을 때 다친 무릎을 수술하게 되면서 일하기가 어려워졌다. 집에 가만히 있지 못해 복지관을 다니면서 봉사를 했다.

하루는 아파트 복도에 웅성웅성해서 나가 봤더니 옆집에 불이나 연기가 자욱했다. 얼른 망치를 가져와 창문을 부수고 경비아저씨를 제치고 옆집으로 들어가 이불에 물을 묻힌 뒤 불을 껐다. 조금만 늦었어도 가스관이 터졌을 것인데 불을 빨리 끌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파트 주민들 사이에서 201호(강정애씨)가 아파트를 살렸다고 소문이 났다. 2018년 아파트 대표를 뽑을 때 주민들이 저를 뽑아줬다. 그때부터 4년 동안 아파트 대표의 임기를 채우고 지금은 쉬고 있다. 우리집은 여전히 이웃들이 모이는 동네 카페다.

아파트에 어르신들이 많은데 반찬도 챙겨 드리고 아프면 국도 끓여드리고 있다. 동 대표로 일하면서 가까운 이웃과 정을 나눌 수 있어서 즐겁고 감사하다.“

 

실향민들과 함께 하는 가자미식해 나눔 행사(사진=강정애씨)
실향민들과 함께 하는 가자미식해 나눔 행사(사진=강정애씨)

▶ 함께 남에 온 아들도 군대생활 자원

엄마의 마음을 이어받아 강씨의 아들도 늘 감사하는 마음을 품고 살아가고 있다. 강씨가 한국에 먼저 정착하고 중국에서 아들도 데려왔다. 중국에서도 학생회 회장을 맡았던 아들이 한국에 와서도 열심히 학교 생활하고 적응해 나는 모습이 기특하기만 하다. 

아들이 발가락 수술로 인해 군에서 공익 판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에서 우리를 받아준 것만 해도 감사한데 나라를 위해서 조금이라도 기여하고 싶다’며 병무청에 가서 입대를 신청했다. 엄마 고향을 바라볼 수 있는 곳으로 지원해서 철원 백골 부대에서 군대 생활을 보냈다.

벽돌 한 장, 흙 한 삽을 안 떠봤는데 대한민국이 저와 제 가족을 받아준 것에 대해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어요. 감사와 보답의 마음으로 탈북민, 실향민들과 함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고 잘 정착하도록 서로 섬기고 있습니다.“

강씨는 오늘도 가족과 이웃을 돌아보며 감사함으로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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